교육마당

  • 학생참관교육
  • 호국영화상영
  • 호국안보전시관
  • 야외전시장
  • 교육자료

교육자료

호국안보 관련 교육자료 입니다.
교육자료 보기
제목 국립영천호국원 조성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 및 주요 안장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9-12 조회수 410

이 곳 영천은 충절의 상징인 포은 정몽주 선생과 노계 박인로, 최무선장군 등 위대한 선현들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으로 신라시대부터 최근까지 여러 차례 국난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영천 출신인 권응수 장군, 정세아 의병장 등이 지역 의병 3,560명과 같이 영천성에서 주둔한 왜군을 궤멸시키고 영천성을 탈환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영천복성이라 하는데, 영천복성은 임란사 의병전의 대승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경상좌도를 확보하게 되는 전략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전투였다고 합니다.

또한 1950. 6. 25. 북한의 기습도발로 6.25전쟁이 발발하고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한달만에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리게 됩니다.

낙동강방어선은 아래로 마산(창원)에서 대구, 영천, 안강, 포항에 이르는 방어선으로 당시 미 8군 사령관인 워커장군이 최후의 저지선으로 결정하였다고 하여 워커라인이라고 하는데 이 워커라인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영천 이였습니다.

영천이 뚫리면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고 그러면 경주에 이어 부산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어 우리나라 정부가 남태평양 서사모아로 망명을 계획하게 되는 상황이였습니다.

그 당시 북한 군 주력부대인 15사단이 칠곡 다부동 공격에 실패한 후

영천지역으로 공격방향을 바꾸어 ‘50. 9. 4.부터 13일 까지 10일간 우리군 8사단, 1사단, 6사단, 7사단과 적 15사단, 8사단, 1사단 등이 치열한 전투를 하여 크게 승리하게 됩니다.

기록을 보면 적 3,799명 사살, 포로 309명, 전차 5대 등을 포획하였으며 우리군은 전사 29명, 부상은 148명에 불과한 대승 이였다고 합니다.

영천전투 승리로 낙동강방어선이 지켜지고 이틀 후인 ‘50. 9. 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더불어 북진의 발판이 되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8사단 지휘소를 2차례 방문하여 “전승기념” 이라는 친필 휘호를 하사하고 장병들의 공을 치하했다고 하며 김일성은 영천전투의 패배가 패전의 원인 이였다고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자책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천대첩기념사업회에서 2002년 이곳 영천국원에 영천대첩기념비를 건립하여 매년 9월 13일 경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영천대첩기념비 내에 당시 8사단장 이였던 이성가 장군의 동상이 설치되어있습니다. 이성가 장군의 부친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관식 선생이며 영천대첩비의 설계는 이성가 장군의 아들인 이강업 한양대 교수께서 설계하였습니다.

이렇듯 영천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지역으로 이곳에 국립영천호국원이 조성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1997년 영천호국원 공사 당시 이 장소에서 삼국시대 묘지터 74기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예로부터 명당자리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학도의용군

6.25전쟁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하신 학도의용군은 총 5만여명입니다.

학도의용군이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2010년 개봉한 “포화속으로” 라는 영화를 통해서 인데요, 당시 포항여중에서 실제로 있었던 전투상황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 학도의용군 중 112위가 이곳 영천호국원에 안장되어 계시며, 매년 11월에는 경상북도 교육감 주관으로 당시 참전했던 학도의용군 중 아직 생존해 계시는 분들을 모시고 “전몰학도의용군 추념식”을 이곳 영천호국원에서 개최하고 있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

그리고 6.25전쟁 당시인 1952년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은 독도에 수시로 상륙해 ‘다케시마’ 라고 쓴 표목을 세우는 등 각종 불법행위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이에 6.25전쟁에 참전했다 부상을 입고 전역한 울산출신 홍순칠이 부산에서 각종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여 1953. 4. 20. 6.25참전군인을 주축으로 45명의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일본인의 독도상륙을 저지하고 어로행위를 단속하는 등 전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독도를 침탈하려던 일본의 야욕을 꺾음으로써 우리땅 독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의용수비대원 중 자의로 12명이 빠지고 마지막까지 수비대원으로 남은 사람은 총 33명입니다. 그 중 3명이 이곳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최연소 안장자

영천호국원 최연소 안장자는 17살에 사망한 고허병철 군으로 당시 대구 영남고등학교 1학년이던 허군은 1983. 9. 22. 밤 대구시 삼덕동 미문화원 앞에서 감색 천가방이 있는 걸 수상히 여겨 대구시경에 가지고가 신고를 하고 미 문화원 앞에 가방이 하나 더 있다고 신고하며 관할 중부경찰서에 경찰관과 같이 미 문화원에 도착하여 허군이 가방을 드는 순간 가방이 폭발하여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된 사건입니다.

그 가방은 부산 다대포 해안에서 생포된 간첩에 의해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져 허군은 대외유공자로 인정되어 2006. 4. 8.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대구 두류도서관 앞에 가보면 ‘허병철 애국정신 선양비’도 세워져 있습니다.

첨부파일

QUICK

  • 안장자 찾기
  • 안장/이장 신청
  • 사이버참배
  • 참배신청
  • 봉사활동 신청
  • 질의응답